하이데거와 죽음 Down
다시 말해서 현존재는 그가 현존재로 실존하는 한 죽음의 가능성에 언제나 이미 노출 되어 있다. 죽음의 가능성 속으로 던져져 있다. 물론 현존재는 일상적으로 이러한 죽음에로의 피투성(SZ, 251)을 애써 부인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어떤 식으로도 죽음에 대한 불안(Todesangst)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다.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이 불안은 나약한 인간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피투적 존재로서의 현존재가 그의 종말을 향해 실존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원초적 기분이다. (SZ, 251) 왜냐하면 이 기분은 바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가장 고유하고(eigenste), 절연적이고(unbezglich), 추월 불가능한(unberholbar) 가능성, 즉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느끼는 불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특성을 지닌 죽음의 가능성이 각 현존재의 존재 구조의 한 계기인 한 불안은 불가피하다.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한 죽음(Sterben)의 두 번째 특징을 하이데거는 그것의 확실성에서 찾는다. 현존재의 실존에 이처럼 언제나 이미 수반되어 있는 죽음, 그 가능성에 언제나 이미 노출되어 있고 던져져 있는 죽음은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가장 확실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확실성(Gewiheit des Todes, SZ, 256)은 누구나 다 죽는다라는 사실에 대한 경험적 확인과 그 확인에서 비롯되는 확신과 안도, 그리고 삶의 유예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비본래적 실존의 특징으로 거부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음은 확실히 온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라고. 사람들은 이 그러나...를 가지고 죽음의 확실성을 거부한다.(SZ, 258) 죽음의 회피 불가능성에 대한 일상적 확신은 삶의 진정성 회복과는 무관하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깊은 숙고를 오히려 거부한다. 어차피 누구나 다 겪을 것이고 다 아는 사실에 대해서 뭐 하러 쓸데 없이 따로 시간을 내어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예리하게 통찰하고 고발하는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일상인 들의 이러한 거짓되고 피상적인 앎이다. 일상인 들은 죽음의 보편성과 필연성에 대한 경험적 확신에 가득 차 있지만,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확실성을 은폐하고, 기꺼이 망각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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